소통과 화합을 강조하는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성준 2군 감독
소통과 화합을 강조하는 지도자, 삼성 라이온즈 성준 2군 감독
  • 김나운 기자
  • 승인 2019.06.24 11: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북고 4관왕, KBO리그 97승의 삼성 올드 레전드
경산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에서 성 감독
경산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에서 성준 감독

[칭찬신문=대구] 김나운 기자=97. 류현진이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는 KBO리그의 역대 좌완투수 중 송진우 다음으로 통산 승리가 많았던 투수의 기록이다. 현재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을 맡고 있는 삼성의 올드 레전드 성준 감독이 바로 그 기록의 보유자다.

초등학생 때부터 야구를 즐기던 성 감독은 중학교 입학 후 갈림길에 섰다. 야구를 계속 하라는 아버지와 공부를 선택하라는 어머니의 의견차 때문이었다. 성 감독은 야구를 선택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성 감독만이 아니었다. 야구를 하겠다던 아들의 손에 단어장을 쥐어주시던 어머니는 공부를 같이 해야 된다고 늘 강조했다. 공부를 중요시했던 외가의 가풍이 맏이에 대한 어머니의 기대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당시 함께 야구를 하던 친구들의 성적들도 준수했던 터라 성 감독은 결국 공부와 운동을 병행하기로 했다.

성 감독은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전 530분에 일어나 1시간을 뛰었다. 당시 서울 선린중학교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박노준 선수가 있었다. 선린상고 진학 후에는 고교야구계의 아이돌 격이 된 선수다. 성 감독은 머릿속에 박 선수를 담으며 목표 대상으로 삼았다. 그가 꾸준히 노력하게 되는 원동력이었던 셈이다. 고교야구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때인 경북고 재학 시절, 마침내 성 감독은 왼손 에이스로서 팀과 함께 전국대회 4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대단한 업적이다. 뒤돌아보면 프로보다 더 화려했던 시절 같다며 성 감독은 덧붙였다. 경북고에서의 4관왕은 프로야구 입단 후 첫 해 최다승 기록과 함께 성 감독이 야구인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이기도 하다.

경북고를 거쳐 한양대학교 시절, 성 감독은 잠실구장의 불빛을 보며 저 야구장에 선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 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해서 또 다시 앞만 보고 달렸다. 약한 몸을 보완하기 위해 체중을 10kg나 불리기도 했다. 포기하지 않고 목표를 바라본 끝에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꿈에 그리던 삼성 라이온즈의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삼성 라이온즈에서 좋은 지도자를 만난 덕에 팬들에게 인식되는 선수가 되었다며 성 감독은 겸손을 표했다. 장남으로서 집안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있었지만, 야구가 좋아서 절로 노력을 하게 됐던 것이기도 하기에 결국 운명적인 노력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운명적 노력은 어느새 성 감독에게는 습관이 되어버렸다. 성 감독은 열심히 살다 보니 운도 따라주고 지금까지 유니폼을 입으며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더라고 말했다.
 

경북고 야구 동아리
모교 경북고의 야구 동아리 단장을 맡고 있는 성 감독.
빡빡한 일정 때문에 자주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가끔씩 들러 게임을 즐긴다.

성 감독의 야구 역사는 프로야구 이전 14, 프로야구 선수로 14, 코치로 19, 감독으로 3년이 되어 도합 50년에 이른다. 야구로 인생을 살고 야구로 인생을 배웠다는 말도 과언이 아니다. 선수 유니폼을 벗으면 야구 지도자로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성 감독은 코치 자리를 거쳐 지금은 삼성 라이온즈의 2군 감독을 맡고 있다. 가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삼성 라이온즈의 유니폼을 입고 야구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자리다. 선수 육성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인 만큼 좋은 선수들을 1군으로 많이 올려 보내기 위해 경산에 위치한 볼파크에서 10명의 코치진과 함께 고심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미야자키 교육리그전에서 삼성 라이온즈 2군 선수들
미야자키 교육리그전에서 삼성 라이온즈 2군 선수들

성 감독이 2군 감독으로서 선수를 대할 때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소통이다. 2군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20대 초중반 선수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명을 받고 들어온 유망한 선수들이지만 큰 리그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많은 피드백이 필요하다. 성 감독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주고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선수들의 마음도 열린다며, 감독이 선수들과 마음을 같이 할 때 시너지 효과가 있고 최대치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팀이 돌아가는 상황과 선수들에 대해 다 아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어린 후배들이 클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것이 보람이라는 성 감독의 눈빛은 선수들을 자식처럼 보듬는 모습이었다.
 

슬럼프가 올 때면 ‘여기서 주저앉으면 답이 없다. 내일 해가 뜨면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견뎠다는 성 감독.

30살이 넘으면 현역에서 내려오던 시대에 성 감독이 38살까지 선수로 뛰었던 힘은, 팀의 특별한 선발이 아닌 빠른 공을 가지고 있지 않은 투수일지라도 100승을 이루어 귀감이 되고 싶다는 각오와 의지 덕분이었다. 아쉽게도 그의 기록은 97승에 머물렀지만, 성 감독은 인터벌이 길었던 선수 시절 팬들이 붙여준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다. 느리지만 변함없이 꾸준하게 정진했기 때문에 2군 감독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느린 공을 가진 투수를 좋게 표현해주는 팬들이 있어서 행복했고, 느림의 미학이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은 자기 자신을 가장 행복한 남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라 말하며 삼성 라이온즈의 올드 레전드 성준 감독은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