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김준호의 신명나는 소리인생
소리꾼 김준호의 신명나는 소리인생
  • 김나운 기자
  • 승인 2019.07.02 20:4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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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무형문화재 4호 「동래지신밟기」 인간문화재 김준호

[칭찬신문=김나운 기자] 어느 PD는 김준호를 자판기라고 부른다. 원고를 보지 않고도 하루 종일 떠들 수 있고 누르면 나온다고 해서 붙여주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대표 국악인으로서 해외공연과 방송, 강연으로 전국을 누비는 섭외 1순위의 소리꾼에게 어울리는 재치 있는 별명이다. 민속예술학교 울림터 회장이자 예술민속학 강사인 김준호는 문장원 기념사업회 이사를 역임하고 있기도 하다.
 

김준호가 소리를 만난 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그는 바쁜 부모를 대신해서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친할머니 손에 자랐다. 할머니 집은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사랑방이었다. 가수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이 유행했던 시절, 5살 꼬마 김준호가 그보다 먼저 배웠던 노래는 할머니들이 들에서 부르는 노래인 총각댕기 꽃댕기였다. 여러 사람이 둘러 모여앉아 자질구레한 일부터 소일거리까지 함께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자연스럽게 들노래와 친해지게 된 것이다. 할머니들의 들노래를 따라 하다 보니 동요를 부를 때에도 ~에 놀~~ ~고 온~’ 하며 소리 풍으로 부르게 되어 초등학교 음악시간에는 그리 점수가 좋지 않았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전문적으로 소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진주 촉석루에서 있었던 김수악 선생님과의 만남이다. 당시 18살이었던 김준호는 김수악 선생님이 장구를 치며 신기한 소리를 내는 모습에 빠져들었다. 바로 구음(口音)’ 연습이었다. 구음이란 국악에서 각 국악기의 특유의 음색을 입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즉 악기의 소리를 의성화 하여 입으로 부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김준호는 구음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뛰어나다는 김수악 선생님께 바디를 했다. 바디란 창자가 스승에게 전수받아 다듬었거나 혹은 창작해 부르는 판소리 한 마당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다. 김준호는 당시 회비는 25천원이었는데, 싹싹하고 똑똑한 덕에 5만원어치는 얻어먹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만큼 김수악 선생님이 그를 많이 아껴주었다는 뜻이다.

기가 막힌 소리의 마력에 이끌린 김준호는 이윽고 소리를 끊고서는 못 살 지경이 되었다. 소리가 너무도 좋아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했다. 다양한 명인 밑에서 수학한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김준호는 김수악 명인을 은사로 구음, 판소리, , 꽹쇠를 수학하고 허종복 명인에게 고성오광대 상여소리, 한윤영 명인에게 가산오광대 중타령, 유병례 명인에게 고성농요 들소리, 한승오 명인에게 서편제 소리, 김병하 명인에게 정선아리랑, 양극수 양극노 명인께 동래지신밟기, 문장원 명인께 동래상여소리, 김말수 명인에게 어산령, 정풍송 명인에게 대중음악론을 수학했다. 하나하나 짚어볼수록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수행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던 탓에 20대의 김준호는 다니던 대학까지 중퇴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막노동부터 시작해서 식당 아르바이트까지 닥치는 대로 하며 어머니와 두 동생들을 거두었다. 경양식 집에서 익힌 음식 솜씨는 지금까지도 종종 실력을 발휘할 정도다. 그러나 힘든 상황에서도 김준호는 끝까지 소리를 놓지 않았다. 해병대 복무 시절 배웠던 강인한 정신력이 도움이 되었는지도 몰랐다.

김준호는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전국을 다니면서 미친 듯이 배움에 힘썼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맨날 배우러 다녔다”. 그런 청년 김준호가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은인과의 운명적인 만남, 춤꾼 손심심과의 인연 덕분이었다. 당시 손심심은 김준호를 반주자로 동반하여 교원연수원에서 학춤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김준호는 강사의 건강 문제로 펑크가 날 판인 강의에 얼떨결에 서게 되었다. 소리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던 때부터 기차를 타고 다니며 지역마다 말투가 다르다는 것을 몸으로 익혔던 김준호다. 옆자리에 계신 할머니께도 질문할 정도로 직접 사람을 만나고 공부하는 일을 좋아했다.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자신의 진가가 발휘되는 자리로 만들어냈다. 2시간짜리 강의가 끝날 무렵에는 전국에서 모인 500명의 교사들 중 반 이상이 일어나 그를 향해 기립박수를 쳤다. 대타로 선 생애 첫 강의는 그렇게 대박을 터뜨렸다. 27살 때의 일이었다.

이 첫 강의를 계기로 김준호의 국악 강의에 대들보가 세워졌다. 정의와 어원, 유래, 이론 등이 제대로 서있고 항상 분석을 바탕으로 한 자신만의 시스템이 그것이다. 궁금증을 가지고 직접 공부한 힘으로 남들보다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니 어느 누구와도 같지 않은 김준호만의 강의로 입소문이 났다.

첫 강의 이후로는 포항산업과학연구원(RIST)에서 강의를 했다. 그때 강의를 들었던 분들은 30년이 지나 총장, 학장 등이 된 지금도 김준호를 강사로 초청한다. “당신 잘 될 줄 알았다며 김준호의 열정적인 강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삼성, LG, 현대, 포스코 등 굵직한 기업에서도 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90년대 MBC에서 방영했던 ‘10! 임성훈입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 우리 소리 우습게보지 말라고 이야기했던 강의는 김준호를 하루아침에 벼락스타로 만들었다. 그러나 김준호는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계속 자신의 길을 걸었다. 지금의 자리까지 이를 수 있게 해준 올곧은 마음이다. 해외공연과 방송 등으로 바쁜 일정이지만 지금도 연간 50회 정도 강의를 한다. 강의를 시작한 지도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한 시간 일찍 도착해서 드라이리허설을 할 만큼 성실하게 임하고 있다. 요즘 강의 주제는 아리랑, 비빔밤을 담다’. 유쾌하고 신명난 공연과 함께하는 강연이다. 2시간 동안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다 보면 한 번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김준호의 팬이 된다.
 


밖에 나가면 여전히 설레고 미친다는 김준호에게 스트레스 받는 일은 전혀 없다. 굳이 하나 꼽자면 도로명주소로 바뀐 뒤 동네 이름을 찾기 힘들어졌다는 것 정도다.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탓에 김준호는 지금도 도서관을 찾고 버스며 기차로 다른 지역을 찾아가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다. 강의의 원천이 되는 어원, 역사, 상징민속, 지방의 전설, 민화, 설화 등 온갖 것을 다 파고든다. 스스로 확신이 섰을 때 강의를 하기 때문이다. 강의의 매력 포인트는 성서 기법을 비유하여 예를 많이 들어 주는 것. 나이가 들어갈수록 조금씩 숲이 보인다는 김준호는 이래서 조상님들이 전국을 떠돌게 했구나생각하며 계속 글을 쓴다고 한다. 이미 우리 소리 우습게 보지 말라라는 책을 한 권 냈지만 다섯 권 분량의 글을 더 써놓았다.
 


김준호는 얼마 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세계 40개국 음악인들이 참가하는 인터내셔널 코어 페스티벌에 울산 어린이합창단과 함께 우리 소리를 널리 알리고 왔다. 이 모든 영광은 춤꾼 손심심이라는 은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김준호는 앞으로도 우리 소리와 우리 춤을 세계에 많이 알리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다. 미치도록 우리 소리가 좋아 몰두하다 보니 뜻이 맞는 사람들과 같이 연주도 하게 되었고, 그러면 카타르시스가 확 느껴진다고 말하는 김준호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천생 소리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