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전환점
내 인생의 전환점
  • 전형구 논설위원
  • 승인 2019.12.0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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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박사의 독서경영 - [그때 장자를 만났다]

 [칭찬신문=전형구 논설위원] 『그때 장자를 만났다』 (강상구, 흐름출판, 2014)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부제가 있는 이 책은 《장자》를 통해 나답게 사는 법과 자유롭게 사는 그리고 타인과의 차이를 인정하는 ‘공존의 법칙’을 이야기하고 있다. 《장자》를 많은 사람들이 무위자연의 사상으로 ‘신선이 될 수 있는 책’ 쯤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자신만의 해석을 해 주고 있다.

또한 저자는 답답한 세상에서 인위적인 틀에 사람들을 가두는 공자의 《논어》보다 자유로운 《장자》를 만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오늘날의 시사점을 서양의 고전과 비교를 해주고 있어서 흥미를 더하고 있는 책이다.

《장자》를 보면 집요하리만치 ‘공자 바보 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인(仁)’과 ‘예(禮)’로 다스려지는 나라를 꿈꾸는 공자를 두고 장자는 ‘되지도 않을 짓을 하느라 평생을 낭비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장자》가 공자의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각만’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장자》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무위’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을 단순히 산 속에 들어가 신선이 되라는 것으로 여기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개인의 변화”에 대하여 ‘내 안의 나 찾기’, ‘마음 비우기’,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파도타기’ 등의 소주제를 다루고 있다. 2부에서는 “관계의 변화”에 대하여 ‘차이 존중하기’, ‘말 아닌 것으로 말하기’, ‘거울 되기’, ‘마음 주기’ 등의 소주제를 이야기 하고 있다. 3부에서는 “사회의 변화”라는 대주제로 ‘인정하고 공존하기’, ‘버림으로써 되찾기’. ‘세상에서 노닐기’라는 소주제를 통해 『장자』를 만나고 있다.

우리는 흔히 ‘다른’ 것을 ‘틀리다’고 말하곤 한다. 학은 오리 다리가 짧다며 늘리겠다고 덤비고, 오리는 학의 다리가 길다며 자르겠다고 덤비는 꼴이다. 학은 다리가 길어서 좋고, 오리는 다리가 짧아서 좋다. 다른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다르다. 그것을 틀렸다고 덤비기 시작하면 세상사 꼬인다. 꼬인 세상에서 살자니 지치고 숨이 막힌다. 기지개를 한번 쫙 펴고 싶다. 답답한 세상에선 인위적인 틀에 날 가두는 《논어》보다는 자유로운 《장자》가 제격이다. - <헛똑똑이 인생, 장자를 만나다> 중에서

“눈밝음이 위태롭고, 귀밝음이 위태하다(目之於明也殆 耳之於聰也殆)” 장자가 문종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내린 평가다. 귀밝고(聰) 눈밝은(明) 게 바로 총명(聰明)한 거다. 하지만 바로 그 총명함이야말로 ‘위태로움’의 근원이다. 그저 귀로만 듣고 눈으로만 보는 탓이다. 사랑, 용기, 관용, 신뢰……. 세상에서 중요한 것들은 어느 것 하나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다. 정작 봐야 하고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보고 들어도, 결국 헛똑똑이가 될 수밖에 없다. - <헛똑똑한 인생> 중에서

《장자》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산에 들어가서 신선 되는 법’이 적힌 책이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쓸모없는 나무’ 이야기도 세속의 쓸모에 연연하지 말라는,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는 가지 말라는 가르침 정도로 읽힌다. 하지만 내가 읽은 장자는 철저히 사람 속에서 살 것을 전제하고, 사람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 다른 사람도 나만큼 중요하다는 걸 인정하자는 게 장자의 시작이요 끝이다. - <쓸모없는 쓸모> 중에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같은 태양을 보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오만이다. 우주에는 태양보다 더 큰 항성이 수도 없이 많다. 해가 열 개 있어 조바심이 나는 건 권력자 한 사람뿐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해를 보고 살면 그만이다. 내가 아는 게 전부고,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라는 생각은, 자칫 남이 아는 것을 부정하고 남의 세상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별하지 못한 결과다. - <틀리지 않고 다를 뿐이다> 중에서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할 줄 아는 ‘잔잔한 물’이 처음부터 잔잔했던 건 아니다. 깊은 산속의 옹달샘에서 두 손에 더 담기도 미안할 만큼 물이 모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냇물이 되어 흐르다. 어느 순간 급류가 되어 집채만한 바위를 굴리기도 했을지 모른다. 폭포가 되어 낭떠러지를 수직낙하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널따란 호수를 만나,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 널찍한 강이 되어 평화로운 잔잔한 물이 된다. “물은 잡것이 섞이지 않으면 맑고, 움직이지 않으면 평평하지만, 막혀 흐르지; 않으면 또한 맑을 수 없다(각의)” - <고요한 물이 거울이 된다> 중에서

금지가 만능이 아니다. 법 하나로 사람을 이기려는 건, 장자의 말처럼 사람으로 하늘을 이기려 드는 무모한 짓이다. 사람의 마음을 따라야 하고, 세상의 이치를 따라야 한다. 절대로 해야 한다. 결을 거스르면, 설령 하더라도 오래 가지 못하고 멈춰 선다. 숱한 개혁들이 좌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명분이 앞서 현실을 무시하거나 간과한다. 독선이다. - <허물을 금할 줄만 알지, 왜 생기는지 모른다> 중에서

틀을 깨려는 노력이 없으면, 규칙 자체를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노력이 없으면, 창조는 없다. 답습이 있을 뿐이다.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천 자루를 몽당 붓으로 만들어” 추사체라는 독특한 필체를 만들어 낸 서예가 김정희는 장자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다. “난초를 그리는 데 법이 있어서도 안 되고, 법이 없어도 안된다(寫蘭有法不可, 無法亦不可).”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개 줄을 걸고 산다. 개 줄을 끊어내야 한다. 그 개 줄은 단지 외부로부터의 간섭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부여하는 속박 역시 개 줄이다. -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중에서

* 전박사의 핵심 메시지

전형구 논설위원
전형구 논설위원

전국시대 사람인 장자는 전쟁이 일상이던 세상을 살았다. ‘죽음’을 현실로 살면서 ‘행복’을 꿈꿨다. 그런 장자가 말한 “무위”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가 단순히 산속에 들어가 도 닦고 신선 되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이 그러하듯, 나 자신의 본성을 되찾고, 동시에 상대의 본성을 존중하자는 말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이다. 즉,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공존하는 법을 터득하라는 메시지다.

우리는 흔히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생각하고 말을 한다. ‘이분법’ 또는 ‘흑백논리’가 그 중심이다. 이런 게 하나의 폭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도 있듯이 ‘나만 옳다’는 폭력으로 가득 판 세상이 바로 오늘날이다. 결국 내가 선택한 길만 옳다면, 나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은 틀린 게 되고 만다. 과연 다른 사람이 가는 길 틀린 것일까?

절대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 악에 빠지기 쉽다. 절대 선은 절대 악을 잉태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이다.

우리는 2500여 년 전의 사상들을 통해 우리 자신, 아니 나 자신의 모습을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공자의 사상에서 얻을 것이 있고, 장자의 사상에서 역시 얻을 것이 있는 것이다. 물론 노자를 비롯한 다른 선현들의 사상에서도 많을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내 것으로 소화시켜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느냐에 있는 것이다.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철학을 오늘 장자에서 만나보면 좋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