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박사의 독서경영 -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
전박사의 독서경영 -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
  • 전형구 논설위원
  • 승인 2020.01.01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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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신문=전형구 논설위원] 『사는데 정답이 어딨어』(대니얼 클라인, 더퀘스트, 2017) “그때그때 나를 일으켜 세운 문장들 39”라는 부제가 있는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 번쯤 고민해 봤을 인생의 문제들에 대하여 철학자들의 명언들을 통해 생각해 보고 있다. 저자는 ‘삶의 의미란 지금 이 순간 언제든 바뀔 것이다. 또다시, 그리고 모든 건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라고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젊은 시절 낡은 노트를 가득 채운 철학 명언을 80살 인생 경험으로 새롭게 정리한 것이다. 저자가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시절, 저자는 어떻게 해야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읽고 그 글귀를 노트에 옮겨 적어두었다. 여기에 적어둔 에피쿠로스, 파스칼, 니체, 사르트르, 흄, 비트겐슈타인, 카뮈, 베케트 등 철학자와 작가들이 남긴 인생의 좋은 글귀는 저자가 최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적절한 해답을 주었다.

  저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자세는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저자에게 죽는 날까지 지니고 다닐 교훈 딱 한 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자신은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모든 행위를 인생의 마지막 행위인 것처럼 하라”를 고르겠다고 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반복해서 ‘지금 여기를 살아라’라고 하는 것은 현재를 온전히 사는 일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지속적으로 지금과 다른 것을 원하는 일의 위험성을 설파하는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도 첫 번째 명언으로 에피쿠로스의 말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인생의 의미’라는 묵직한 주제 앞에서도 저자는 웃음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책을 훑어보다 문득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젊은 시절의 내가 순진했다며 헛웃음을 지었지만, 사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시간은 조금씩 흘렀고 인생이 다 그렇듯 내 인생도 이런저런 부침을 겪으며 어느덧 이렇게나 지나왔지만, 철학에서 말하는 삶을 알고자 하는 욕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나이 여든에 이르러 삶을 돌이켜보니 오히려 더 강렬해졌다. 늦은 감은 있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삶의 마지막을 최선을 다해 살고 싶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

  네가 갖지 못한 것을 갈구하느라 네가 가진 것마저 망치지 마라. 기억하라. 지금 가진 것도 한때는 네가 꿈꾸기만 하던 것임을. - 에피쿠로스

  낡은 명언집에 맨 처음 수록한 구절이다. 쾌락주의가 그저 자기중심적인 젊은 애송이의 망상이 아니라 유서 깊은 철학 사조임을 깨닫자마자 나는 쾌락주의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나는 나 자신이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것 같다. 되도록 많은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지만 도를 넘고 싶지는 않았다. 두려웠다. 에피쿠로스가 내 흥미를 끈 것도 이 때문이다. 에피쿠로스는 신중한 쾌락주의자였다. - <완벽주의, 현재를 살지 못하는 사장 완벽한 방법> 중에서

  정신적 재화는 적어도 육체적 재화만큼 중요하다. - 버트런드 러셀

  라셀은 “숙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 소크라테스와 다르게 사고를 만족스런 삶을 살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러셀은 오히려 숙고하는 삶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근본적인 기쁨 중 하나라고 보았다. 그에게 사고하는 일은 그 자체로 침대에서 뒹구는 것보다 더한 즐거움이다.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에피쿠로스와 달리 러셀은 혼인 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매우 적극적인 성생활을 즐겼으며, 따라서 “육체적 재화”라는 말을 순진한 의미로 쓰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좋은 재화가 있는 반면 매우 좋은 재화가 있다. 편안한 의자에 혼자 앉아 이런저런 철학적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얻는 그런 즐거움 말이다. - <철학은 ‘머리로 하는 자위’> 중에서

  이 세상에서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는 철학자는 순수 형이상학 문제에만 신경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원하는 대로 무조건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딱히 없음을 증명하는 데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나로 말하면 …… 무의미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성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유를 위한 도구다. - 올더스 헉슬리

  철학적 허무주의가 다루는 무의미는 범위가 매우 넓다. 모든 존재를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허무주의에서, 우리가 그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잇는 세계 안에서 지금의 사회가 정한 가치와 규칙을 거부하는 도덕적·정치적 허무주의까지 이른다. 특히 이 마지막 도덕적·정치적 허무주의에 빗대어 볼 때, 우리가 사회·정부·종교가 물려준 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삶은 고전적이며 쾌락주의적인 방식으로 더 즐거워진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 <침실에서는 삶의 무의미함도 훨씬 괜찮아 보인다> 중에서

  모든 일에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선하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도덕적인 부분이 없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즘을 진지하게 도덕철학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핵심일 수도 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추상적 주장만 가득한 도덕철학은 우리네 삶과 별로 연관성이 없을지도 모른다. 20세기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윤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자 이렇게 대답했다. “먹고사는 게 먼저고 윤리는 그다음이다.” 윤리적 의사결정이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할 필요가 없는 이들을 위한 사치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 <보상 없는 선행은 쉽지 않다> 중에서

  절대자를 보았다. 내 저작과 견해 모두를 고쳐야 할 것 같다. - A. J. 에이어

  철학이 유의미하게 다룰 수 있는 주제가 갑자기 볼링 핀 마냥 와르르 무너진다. 이런 윤리학과 미학도 저기 같이 무너지는군. 아, 신이시여. 철학자들이 지난 몇 천 년간 논쟁했던 각종 형이상학적 주제들과 함께 저기 종교와 신학도 무너집니다. 전 세계 철학자와 철학 전공생들이 모두 태아처럼 웅크리고 누워 “그게 전부인가?”하며 신음했지만, 끝내 논리실증주의에 대항할 논리적 주장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우리에겐 이처럼 어수선하고 형체 없는 감정이 남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엄밀한 철학을 만들 수 없다. - <냉소적인 너마저!> 중에서

  지금이 두 번째 인생인 것처럼, 그리고 첫 번째를 잘못 살았던 것처럼 살아라. - 빅터 프랭클

  두 번째 구절에서 프랭클이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알겠다. 삶의 올바른 방식을 찾기 위한 전략으로서 이를 제안한 것이다. 그는 삶의 목적이라는 질문을 추상적인 사고 대신 구체적인 사고실험으로 끌어들인다. 이 질문에 대한 어떤 답도 순수 지성보다는 상상의 영역에서 더 찾기 쉬울 것을 감안하면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인간의 마음은(적어도 내 마음은)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적인 방향으로,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이것이 시사하는 원리 쪽으로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 <힘들어도 삶에 답해야 할 이유> 중에서

* 전박사의 핵심 메시지

전형구 논설위원
전형구 논설위원

저자가 던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너무 급하게 인생의 정답을 찾으려고 부단히 애쓰는 것 같다. 그런데 세상에 하나만 옳고 나머지는 틀린 정답이란 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삶의 의미란 지금 이 순간 언제든 바뀔 것이다. 또다시. 그리고 모든 건 결국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라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답을 찾아야 될 것이다.

  사람들은 철학을 배우지 않았지만 누구나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이런 점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현재를 즐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만족할 수 있는 삶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일 것이다. 로마의 황제이자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던진 “모든 행위를 인생의 마지막 행위인 것처럼 하라”를 기억하면 좋겠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문제가 “어떻게 살 것인가”일 것이다. 여기에 명쾌하게 정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철학자가 과연 있을까? 옛 성현들뿐만 아니라 평범하게 삶을 살다가 가신 선조들이 했던 말이 바로 ‘사는 데 정답이 어딨어?’다. 맞는 말이다. 각자가 살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야 된다’는 게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아가는 게 인생일 것이다.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답을 찾으려고 조급해 하지는 말아야 된다. 살아가는데 너무 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삶의 방식이 변해야 된다. 그러기에 살아가면서 어떤 게 정말 정답인지를 차근차근 알아가 보면 좋겠다.

  이 책이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