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기미독립 3. 1 독립운동 을 맞으며(1)
1919 기미독립 3. 1 독립운동 을 맞으며(1)
  • 박철주
  • 승인 2019.03.0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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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대전인동장터 독립만세운동 조형물

【칭찬신문=대전】 박철주기자="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윈스턴 처칠-

"자신이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바로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바로 읽혀 바로 알게 해야 할 것 이다" -단재 신채호선생-

1919 기미독립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 하게 된다. 이에 기자는 일회성 년례행사로 맞이하고, 그칠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민족정신 속에 깊히 뿌리 내려, 확고한 국가관, 민족관으로 자유대한 독립정신이 계승되어져, 역사의 진실성이 이어져야 함을 절실히 깨달아 느껴지기에 몇 회에 걸쳐 참고자료 등을 인용, 살펴가면서 연재 하고자 한다.

그야말로 나라 없는 백성은 있을수 가 없으며, 또한 백성 없는 나라도 존재할 수 없다 하겠다.

때문에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기하여 다시 한 번 나라와 민족의 소중함을 심장 폐부로 절실하게 체감케 되는 계기가 되기를 두손 모아 간절하게 염원해 본다.

한일강제합병으로 한반도의 식민화가 시작된 암흑의 세월 9년, 1919년 기미년 3월 1일에 뒤늦게나마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울분으로 온 백성이 하나되어 3.1 독립운동이 전국방방곡곡 에서 200만 이상 애국애족의 민족혼이 전국강산에서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일합병조약으로 온 나라가 등불 꺼진 캄캄한 밤을 만나 국가적 위기 속에 상실되어 가는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구국일념으로 분연히 일어나게 되었다.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심의 발로로 국가를 위해 피를 흘릴수 있는 담력의 희생정신으로 일어났다.

일제의 심한폭력, 고문, 허위자백, 거짓날조, 악독하고 잔악무도한 고문을 자행, 주먹과 곤봉으로 온몸을 사정없이 구타하고 천장에 매달아 때리며, 쇠를 불에 달구어 죄인의 몸을 지지는 형벌을 8시간씩 이어가며 심지어 산으로 끌고가 소나무에 묶어 놓고 칼로 위협, 허위 자백때까지 고문 등으로 포악하고 반인륜적이며 야먄적인 무단식, 통치로 여러날 굶긴 후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이를 바라보게 하는 일들 속에 모진 고문은 한초(秒) 한초씩 고통을 참아낼수 있었으나 고문 후에 몰려오는 허기가 가장 견디기 어려워, 자신의 의복 속의 솜을 띁어 먹거나 문창호지를 씹어 먹는 등 심지어 자신이 깔고 자던 썩은 짚을 삼키기도 했다고 한다.

참으로 국가와 자신의 신앙양심을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로 형극의 길을 걸었다.

3.1 운동의 기폭제로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 자결주의" 에서 비롯되어 "그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의 역사에 따라 결정한다" 라는 요지였던 것이다.

이는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민족강화회의 에서 미국 윌슨이 약소 민족의 자결주의를 제안한 것에서 여러 피압박 민족들에게 충격을 던져 우리 민족에게는 국권회복의 큰 소망을 갖는 계기가 된 것이다.

여기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큰 용기를 얻어 독립을 달성해 보자는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 남강 이승훈과 기독교 목사들, 박희도가 지도하는 기독학생회도 운동에 동참케 된것이었다.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자극했던 결정적 계기는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황제가 1919년 1월 21일 오전 10에, 67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석연챦은 죽음으로 서거한 사건으로, 항간에 일제의 독살설이 퍼진 이후 국상기간 내내 밤낮으로 끊이지 않는 고종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통곡소리가 바로 나라잃은 백성의 서러운 울음이요 통공의소리로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는 호곡소리가 메아리쳐 마치 하늘을 찌르는듯 하였다 한다.

나라 잃은 설움은 일제에 짓눌려 있던 백성들로 하여금 민족적 의분과 울분을 유발 시키기에 충분하여 남녀노소 계급, 지위 따위의 차별이란 전혀 없이 나라를 되찾아 보자는 일치된 민족감정뿐이었다.

온 국민과 민족대표들은 나라 잃은 슬픔이 극에 달하던 때, 고종황제의 국장을 보기위해 수많은 인파가 서울로 모여들 것을 예상하고, 이시기를 독립운동 절효의 기회로 삼아 고종황제의 장례식인 3월 3일을 이틀 앞둔 3월 1일에 거족적인 민족운동인 3.1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된것이다.

1919년 3월 1일 2시, 서울파고다 공원에서 5천 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역사적인 독립선언문 낭독이 있은 후 일제히 독립만세도 우렁차게 외쳤다. 같은 시간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중 29인이 참석한 가운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기미독립선언서에는 3.1 독립운동의 정신이 집약되어 있다.

(1919년 2월부터 밤에 3주 동안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한편마다 3-4일씩 걸려서 기초를 작성했다) 독립선언서에는 일제의 무자비한 통치에 반항하거나 원망하는 내용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자립자존 해야한다는 대의에서 신분과 성별을 초월한 자유, 평등의 정신, 세계평화와 인류복지를 추구하는 우리나라의 고매한 민족정신이 깃들어있다.

"유규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기미년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족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로 시작하는 1948년에 제헌헌법의 전문을 볼 때, 대한민국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웅변해 주고 있다 하겠다.

고로 3.1 정신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계승 되어야만 할 자랑스러운 건국 정신이다.

독립선언문은 보성사 인쇄소에서 2월 7일 밤 6시 2만 2천장을 찍어서 보자기, 가마니, 학생책가방, 행상의 상자 속에 실려서 서울 시내를 비롯 지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토요일, 겨울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싸늘한 날씨 속에 파고다공원,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서울주변 산봉우리마다 횃불이 올라가고 독립운동의 심지가 당겨지게 되었다.

같은 3월 1일 의주, 선천, 평양, 진남포, 안주, 원산, 함흥 등지에서도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이 온 천지에 메아리치게 되었다.

서울에서만 첫날 40-50만명이 참가했다.

이렇게 3.1운동의 함성이 전국 곳곳으로 울려퍼져 동네청년의 사랑방에서 ,또 시골 아낙네의 골방에서도 수많은 태극기가 그려지고 수많은 독립선언문이 쓰여지게 되었다.

북부지방에서는 3월 초순, 서울을 제외한 중부와 남부 지방에서는 3월 중순부터 5월 말까지 독립운동의 불길이 이어졌다. 심지어 만주, 연해주, 미국 등 해외까지 확산 되었다.

경의선, 경원선, 경부선 등 철도변에 위치한 주요 지방으로 전파, 나중에는 산골과 섬마을 까지 파급, 전국 211개군에서 1,542차례나 일어났다.

남녀노소, 유생, 교사, 학생, 종교인, 상인, 농민, 노동자 등 각계각층 200여 만 명의 백성들이 지역과 종교, 신분을 초월하여 참여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한 독립선언서의 공약삼창을 지표로 한국민족이 살고있는 곳이면 국내든 해외 어디든 거족적이고 전국적인 3.1 운동이 전개 되었다.   -계속연재-

 

참고자료/유관순-불꽃같은삶.영원한 빛 P248

            이희승-내가겪은 3.1운동,삼일운동50주년 기념논문집(동아일보사 1969 )P399-400

            이종률-3.1운동과 민족의 함성(인문당,1984)P220-221

            박윤식-구한말 일제 강점기(도서출판 휘선,2011)P90-121

【칭찬신문=대전】 박철주기자 cjpy777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