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기미독립 3. 1 독립운동 을 맞으며(3)
1919 기미독립 3. 1 독립운동 을 맞으며(3)
  • 박철주
  • 승인 2019.03.11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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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 -
공주영명중,고등학교(영명학당) 유관순 기숙사 앞 벽화

【칭찬신문=대전】 박철주기자=기미독립, 대한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연일연야 이어지고 있다.

실로, 3.1운동에 있어서 일반, 노동자, 농민, 학생, 종교인(기독교인) 등,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나라를 빼앗긴 설움과 울분에 찬 온국민들의 염원이 담긴 함성의 표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지라! 이에 본기자는 그 어떠한 사상과 이념적 편견에 치우치기 보다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아니, 되찾고자 하는 그 힘의 원동력을 신앙적인 면에서 접근해 보고자함이 다분할 수도 있다 할것이다.

이는 독립선언문을 제창 발표한 민족대표 33인중, 16인이 기독교인임에 주목할만 하다 할 것이다(최근 현대사 조명작업으로 일전에 모방송국에서 방영,  민족대표33인 서명자 이외에 서명하지 아니한 15인이 더있는바, 독립선언문 제창자는 48인이다라고 주장하며, 그 가운데에서도 6인이 기독교인 이라고 보도한바가있다)

공주 영명중고등학교 유관순열사 기념기숙사앞 벽화 에 독립선언문글자로 수놓인 태극기

때문에, 기독교신앙을 간직한 나로서는,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로 극찬 받고있는 성경(Bible)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며 받아들인자는 그 속에서 신관, 우주관, 국가관 ,인생관, 미래관, 내세관에 대해서는 확연하게 알아갈 수 있게 되고야 만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라 확언하고싶다.

여기서 3.1 독립운동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국가관(나라사랑)에 대한, 이해도를 더 높혀 보고자 하는 것이다.

100여 년 전 개화의 물결과 함께, 열강의 침탈이 거센, 너무나도 냉혹하고도 처절한 시대에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약관 18세 어린나이로 일제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한 열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공주 영명중고등학교 입구 우측에 자리한 유관순열사 기념공원 동상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 보통과 입학,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 1918년 이화학당 보충과를 졸업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입학, 1919년 3월 1일 서울 기미독립 만세운동참가,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주도 일본 경찰에게 체포,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 받고 후에 항소,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 선고, 1920년 3월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 주도,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하였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올해 2019년 3월 1일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3.1운동의 상징으로서,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과 애국심 함양의 표상이되어 민족정기 선양에 기여하고, 비폭력, 평화, 민주, 인권의 가치를  드높이는 등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한  주요공적으로 조카 유장부가 대신하여 독립유공 포상을 수상하였다.

이러한 유관순의 집안은 조선 중기 광해군때까지 중앙정계의 관원을 지낸 명문 사족(士族)으로 3.1운동 당시 유열사는18세로, 이화학당의 보통과를 졸업하고 ,고등보통학교 1학년 학생신분으로 교비생(장학생)으로 추천될 만큼 영민하고 똑똑했다고 한다.

공주 영명중고등학교 동산에 자리한 유관순과 사애리시 선교사의 동상

이것은 공주에서 영명학교를 세워서 신문물의 교육을 펼쳐오던, 미국감리회 사애리시 선교사가 부흥회 인도를 위해 천안 지령리교회(현 매봉교회)를 방문 하여, 그때 야무지고 당찬 모습의 소녀 유관순을 만나게 되어, 유관순을 수양딸로 삼아 공주로 데려와 1914년 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 학비도 면제, 생활비도 지원, 사애리사 교장 사택에서 숙식을 제공하며, 특유의 활달하고 명랑한 모습으로 학업에 정진, 이때부터 어린 유관순의 마음속에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싹트기 시작 하였다 한다.

유관순은 영명여학교에서 서울 이화학당으로 전,편입간 후에 1919년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서다가 학교가 휴교 되자 귀향, 천안으로 내려와 4월 1일 아우내장터 장날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주도 앞장서다 일본경찰에 체포되게 된 것이었다.

공주경찰로 압송된 유관순은 공주읍내에서도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된 오빠 유우석도 만나게 되었는데.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엄마도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남매는 한동안 부둥켜앉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유관순은 재판정에서 "왜? 제나라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른것이 죄가 되느냐!"며 굴하지 않았으며, 감옥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한다.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과 폭력은 더욱 가혹, 유관순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순간에도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 입니다"라고 말했다 하니, 과연 그의 나라에대한 애국심을  무엇으로 말할수가 있다 할것인가?

결국, 19세의 꽃다운  청춘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고야  말았다.

이러한  유관순의 강인함과 순결한 피는 별이 되어 오늘도 우리민족, 겨레의 앞길을 밝히는 등블이 되어 빛을 발하고있다. 이에 유관순의 애국애족 정신을 오래도록 기려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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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신문=대전】박철주기자 cjpy777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