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 전형구 논설위원
  • 승인 2023.04.23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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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신문=전형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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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신문=전형구논설위원]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 《『史記』》

복숭아와 자두는 말을 하지 않지만 아래에 저절로 지름길을 만든다

 

  도리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는 덕이 있는 자는 잠자코 있어도 그 덕을 사모하여 사람들이 따른다는 뜻으로 사마천이 이광을 평한 말이다.

 

  복숭아와 자두의 열매를 따 먹기 위해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져 자연히 지름길이 생기듯, 이광의 마음씨가 사람의 신뢰를 이끌었다는 비유의 글이다.

  시골 사람처럼 투박하고 말도 잘하지 못했으나 청렴하고 부하를 아꼈던 이광을 두고 사마천은 “‘자기 몸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시행되며, 자기 몸이 바르지 않으면 명령해도 따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광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한다”라고 칭송했다.

 

  이광은 한나라의 오랜 적 흉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전설적 존재였는데, 청렴한 성품으로 상을 받으면 부하들에게 나눠 주었다. 군사를 인솔하며 식량과 물이 부족할 때에는 물을 보아도 병졸들이 마시기 전에는 먼저 입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그에게는 희한한 습관이 있었다. 활을 쏠 때는 아무리 적이 습격해 와도 수십 보 안에 다가오지 않거나 명중시킬 자신이 없으면 쏘지 않았는데, 쏘기만 하면 활시위 소리가 나자마자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말하자면 싸움 자체를 즐겼다. 이 때문에 그는 싸움터에서 자주 적에게 포위되거나 곤욕을 당했다.

 

  그럼에도 사마천이 기록했듯이 이광은 전한 시대 흉노와 벌인 70여 차례의 싸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비장군(飛將軍)으로까지 불렸다. 그러나 그의 벼슬은 구경에 불과하여 제후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고, 이광 역시 이런 사실에 별로 수긍하지 못했다.

 

  이광이 정치에 밝지 못했고, 어리석고 순진해서 조정의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평가 절하된 면모까지 이 여덟 글자로 정리할 수는 없지만, 이광이 제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장군과 장군이 아닌 자에게 요구되는 역할의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 매일 읽는 중국고전 1일1독, 김원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