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취현 불가굴치(可就見 不可屈致)
가취현 불가굴치(可就見 不可屈致)
  • 전형구 논설위원
  • 승인 2023.06.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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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구논설위원
전형구논설위원

[칭찬신문=전형구논설위원] 가취현 불가굴치(可就見 不可屈致) - 《『三國志』「제갈량전」》

가서 만날 수는 있어도 굽혀서 오게 할 수는 없다

 

  가취현 불가굴치(可就見 不可屈致)는 인재란 온 정성을 다해 데려와야 한다는 의미로, 삼고초려(三顧草廬)란 말과 유사하다.

 

  『三國志』「제갈량전」에 의하면,

  제갈량은 자가 공명(公明)이고 농사를 지으며 ‘양보음(梁甫吟)’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는 평소 자신을 명재상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지만 당시 알아주는 자는 거의 없었고, 단지 최주평(崔州平이)나 서서(徐庶)등과 친분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유비는 신야(新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를 만나러 온 서서가 와룡(臥龍)인 제갈양을 만나 보라는 조언을 하자, 유비는 서서에게 데리고 올 수 없겠냐고 했다. 그러자 서서는 “이 사람은 가서 만날 수는 있어도 굽혀서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可就見 不可屈致也).”라고 하고는 몸소 찾아가야 될 것이라고 했다.

 

  유비는 세 차례나 찾아간 다음에야 비로소 제갈량을 만나, 옆에 있는 사람을 내보내고 붕괴 직전의 한나라 왕실의 상황을 말하면서 자신의 역량은 부족하지만 천하의 대의(大義)를 펼치고자 하니 도와 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다.

 

  제갈량은 유비가 자신의 낮은 신분을 괘념치 않고 세 차례나 몸을 굽혀 찾아온 데 감동했다. 그는 당시의 형세를 일목요연하게 분석하여 조조가 북방의 원소를 무찌르고 강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로 시운(時運)만이 아니라 인모(人謀)를 듣고, 강동의 손권은 이미 3대째에 이르러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으므로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과거 고조가 제업(帝業)을 세웠던 익주를 근거지로 하여 천하를 도모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대안을 내놓았다.

 

  당시 제갈량의 나이가 겨우 20대 후반이었으며, 이후 유비의 군사(軍師)가 되어 오나라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여 삼국정립(三國鼎立)의 초석을 다졌다.

 

  이 둘은 수어지교(水魚之交)의 관계를 지속하면서 君臣關係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 매일 읽는 중국고전 1일1독, 김원중